2009년 08월 13일
사라진 것들과 대면하는 방법, [퍼블릭 에너미]

시네마틱한 얼굴에 대해 생각하다
영화 속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이미 사라진 것들이다. 배우도, 장소도, 시간도, 더 이상 현실에서의 존재를 갖지 못하고, 스크린 위의 흔적처럼 떠도는 유령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은 사라진 것들, 그 흔적들과 대면하는 방법이다.
이미 사라진 시대에 대한, 그리고 그 시대의 영화들에 대한 영화는 그러한 흔적들을 응시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30년대 갱스터 영화에 대한 경외로 가득찬, 마이클 만의 <퍼블릭 에너미>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30년대의 존 딜린저가 아니라, 그것의 부재이다.
남아있는 것은, 텅빈 공허뿐
초현실적일 정도로 텅 빈, 끝없이 이어진 회색의 교도소 담과 파란 하늘이 만드는 수평선으로만 이루어진 영화의 첫 장면은 평면적이고 밋밋하다. 단번에 세트임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은 차갑고 건조하다. 딜린저를 제외한 다른 인물들은-한눈에 연인이 되는 빌리조차도- 냉담할 정도로 단조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 속에서 도드라지는 것들은 아주 잠깐 스쳐가는 것들, 이를테면 클로즈업 속 딜린저의 미세한 표정의 변화, 회색빛 코트의 몽톡한 질감, 경찰서 안의 희뿌연 빛 속에서 떠다니는 셀 수 없는 먼지들, 그런 것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런 것들은 부재하는 것에 대한 끝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그 시절에 부재한 것들, 그리고 지금 역시 가질 수 없는, 이를테면 쿠바보다 더 먼, 어떤 곳, 리오의 따뜻한 햇살, 파티와 춤과 아름다운 여자들과 떠들썩함,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와 같은 것들에 대한, 꿈꾸는 것에 대한 동경이다. 그리고 또한, ‘내가 사랑하는 것은 야구, 영화, 좋은 옷과 멋진 차와 위스키, 그리고 당신’ 이라고 담담하게 말할 수 있는 솔직함, 그런 사라진 ‘스타일’에 대한 동경이다. 아마도 우리가 피츠제럴드의 소설에서 익히 보아왔던, 가벼움과 무기력함, 막을 수 없는 쇠락으로 가득한, 그 세계 말이다. 우리는 아마도 영화 속에서, 30년대의 영화에서보다 더욱 더 애타게 그것들을 동경하는 이 영화에서 그 부재를 갈망한다. 우리는 그 시대에서, 그 시대의 영화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왔으므로, 시간의 길이만큼 그 동경은 깊어진다.
이 부재, 그리고 공허에 대한 애태움은 존 딜린저와, 그의 표정, 그리고 영화 속에서의 그의 존재방식에 의해 우리에게도 전해진다.
교도소로 잡혀 들어오며 환한 플래시와 번쩍이는 카메라 한가운데에서 등장하는 딜린저는, 마찬가지로 그를 영원히 회색빛 스크린 위에 결박시키려 끊임없이 돌아가는 영화 카메라 속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영화 속에만 머무는 인물이다. 죽기 전 그가 극장에서 바라보는 클라크 게이블-대중에게 환영받고 우상시되는 자신을 연기하는-의 모습은 그 자신의 모습이다. 그는 실제에서 영화 속으로, 사라진 시간 속으로 스며들어간다.
사라지는 얼굴(들)
<퍼블릭 에너미>에서 우리의 가슴 속에서 오래도록 떠나지 않는 것은, 전설적인 갱 존 딜린저의 얼굴, 정확하게는 그를 연기한 조니 뎁의 얼굴이다.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처럼 건조한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얼굴. 스크린 가득 밀도있게 잡아낸 그의 클로즈업은 평평한 화면에 깊이감을 만든다. 연인을 바라보며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보일 듯 말듯, 금세 사라져 버리는 미소를 짓는 표정에, 나를 잠 못들게 하는 건 (두려움이 아니라) 커피, 라고 툭, 한 마디를 내뱉을 때의 냉소에, 동그란 썬글라스 속에서 살짝 치켜올라가는 눈빛에 스쳐가는 피로감은 황량한 내면의 풍경을 들여다보게 한다. 벨라 발라즈가, 그리고 자크 오몽이 섬세하게 지적했듯, ‘클로즈업은 하나의 얼굴인 세계 속에 우리를 투영하고, 또한 거꾸로 우리 안에 그 세계를 투영한다. 따라서 클로즈업이 드러내는 것은 하나의 정신 현상, 즉 하나의 영혼’이기 때문이다.
종반의 인상적인 장면에서 딜린저는 죽은 자신을 대면하며, 평평한 영화 속 공간에 시간의 깊이감을 부여한다. 유유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찰들을 따돌리고, 당돌하게도 경찰서 안을 거닐며 수배자로 지목된 자신의 사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미 모두 죽은 그의 동료들의 사진들 옆에서, 죽음을 앞둔 혹은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듯한 그의 얼굴을 만난다. 딜린저가 바라보는 사진은 그 자신이지만, 그 얼굴의 클로즈업은 지나간 시간, 그리고 지나갈 시간, 사라져갈 시간을 환기시킨다. 그것은 비로소 ‘시간을 위한 얼굴’이 된다. 쇼트-리버스 쇼트처럼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얼굴을 자기 자신에게도 되돌려줄 때, 우리는 그것이 부재하는, 죽을 자의 시선임을 안다. 사라진 얼굴과 사라질 얼굴. 이 사이에서 시간이 만들어진다. 흐릿한 담배연기와 거친 입자의 공기를 지나, 죽은 자들의 이름을 거쳐 그가 대면하는 것은 이미 죽은 자, 텅 빈 자신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그의 외로움에 가장 직접적으로 다가간다. 얇은 장면들의 표피들을 걷고, 곧게 그의 내면으로 다가서는 그 순간, 영화는 수평적 공간에서 수직적 공간으로 이동하고, 겹겹이 쌓인 감정의 공간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텅 빈 응시는 두 개의 거울처럼 반사되며 이미 죽은 자의 시선으로 우리에게 되돌려진다. 얼굴은 사라지며 끝없이 되묻는다. 부재하는 것, 한 번도 가진 적 없었던 것에 대한 결코 채워지지 않을 향수, 이 외로움의 잔인함에 대해, 이것은 너희의 것이 아니냐고, 끊임없이 되묻는다.
Bye bye, blackbird
Peggy_Lee_-_Bye_Bye_Blackbird.mp3
# by | 2009/08/13 17:16 | Cinema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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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멋진 글을 쓰다니.. 자긴 천재야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