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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잃다

씨네큐브에서의 마지막 영화는 '세라핀'으로 정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온전히 영화를 즐겼다.
씨네큐브는, (누군가과 함께 있어도 여전히) 나만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

알랭 레네의 새 영화를, 아녜스 자우이의 신작을 제일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곳도 이곳 씨네큐브였고, 비오는 일요일 아침에 드문드문 앉은 몇몇 관객들 사이에서 주인공과 함께 공포에 떨며 구로자와 기요시의 [큐어]를 볼 수 있었고, 요리스 이벤스의 아름다운 읋조림 같았던 다큐들을 처음 만날 수 있었던 곳도 여기였다.

데이빗 린치의 세 시간이 넘는 [인랜드 엠파이어]를 함께 경험하던 어둠, 그 은밀한 세계로 깊숙히 빠져들었다 미처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과 눈빛을 나누는 쾌감은 몇몇의 사람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었다.

지아 장커의 [스틸 라이프], 마지막 장면의, 공중을 떠 가는 듯한 줄타기의 아슬아슬한 삶과 초현실의 경계는 온전히 극장에서만, 그리고 홀로 큰 스크린을 마주할 때만 볼 수 있는 것이었다. 스크린을 대면하는 순간에야 하늘과 땅 위 어디에도 설 곳 없는 외로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로소, 나는 이곳에서 지아 장커를 다시 만났다.

 

이곳에서 마지막 만난 영화, [세라핀]은 한 치의 동정도 남기지 않는, 그래서 더욱 솔직한 영화였다.

약속도, 기다림도 믿지 않는 그녀는 묵묵히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살고, 살고, 또 살아나간다. 그림이 그녀의 삶이라면, 남의 집 빨래며, 허드렛일이며, 차를 내려 주는 일 같은 것들은 그 삶을 가능하게 해 주는 생활이다. 그러나 그녀의 그림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그림에 광기가 어려 갈수록, 그녀의 삶은 생활을 잠식한다. 그녀의 주변에는 단지 그림과, 자연과 천사의 속삭임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수집가도, 그녀에게 먹을 것을 갖다주는 젊은 친구도 있긴 하지만, 여전히 그림을 그릴 때 그녀는 혼자이고, 그리고 혼자 죽어갔다. 그녀의 진가를 알아본 수집가는 전쟁이 끝난 후 한참 후에야 그녀를 다시 찾았고, (의도야 어쨌든) 이웃들은 그녀를 정신병원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그녀를 찾아온 수집가 역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조금 더 좋은 방을 마련해 주는 것뿐이었다.

그녀는 오직 성모와 천사와 나무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고 노래할 수 있었다. 마법처럼 병원의 창문이 열리고, 들판의 외로운 나무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은 처연하다. 마치, 그 모습은 한 치 발 디딜 곳 없는 이 동정없는 세상에서, 나풀, 멀어져 가는 듯 하다.

 

아무런 기적도 남기지 않고, 그저 세상에서 멀어져 가는 꿈결 같은 삶을 담담하게 응시하는 영화의 황량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니, 사라져 가는 영화관의 운명이 겹쳐졌다. 더 이상 땅 위에 발붙일 데 없이,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사라져가는 극장에서, 나는 문득 내가 사랑했던 모든 영화들을 잃는 것처럼, 마음이 아팠다.



by 로자 | 2009/08/27 17:22 | Cinema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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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11/28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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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09/12/08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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