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06월 13일
27.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버려진 육체, 혹은 욕망의 빈 구멍의 파국>
이 영화는 홍상수의 세번째 영화이다.(다섯번째 영화가 아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 이후,
'오! 수정'과 '생활의 발견'에서 줄곧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의
육체에 대한 지난한 줄다리기를 계속한 이후, 그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동어반복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어반복이 지루한 것은 그의 인물들 음담패설을, 일상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늘어놓아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반복하면서 점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상의 반복, 무기력, 지루함,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는 대신
그것들이 구축한 일상을 부정해 버리면서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오 수정의, 포크와 나이프의 모티브처럼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헌준과 지태가 중국집 여자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수작을 거는 장면과 같은)와 같은 동어반복은 차라리 귀엽게 보아 줄 수 있다. 지겨운 것은 그러한 동어반복을 되풀이하는 인물들이다. 이제 더이상 그들은 공허하거나 귀엽거나 관객을 뜨끔하게 하지 않는다.
그저, 얼굴만 바뀐 한 여자 두 남자의 욕망의 화살표는 지루하기만 하다.
게다가 인물의 관계가 욕망의 화살표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대상만을 향한 것일때,
결과적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한 파국을 지켜보는 것은 불편하다.
그들의 육체는 어느 누구도 그들 자신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
헌준의 욕망은 자신을 무한히 기다려준다고 믿고 있는 선화의 순결을 확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선화가 강간당했다고 말했던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문호는 선화의 육체를 욕망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믿으면서 파국을 자초한다.
사실 그가 욕망했던 것은 좀더 실제적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훌륭한 학교'에서 교수가 되는 것, 그것은 스탠드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그에게 '선생님은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하세요'라는 말을 듣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육체(목도리의 좋은 '냄새')에만 탐닉하는 그는 그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욕망하고 있다고 생각한 욕망의 대상에서 비껴져 나간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하면서(혹은 애써 무시하면서) 그 대상을 선화의 육체로 돌린다.
그것은 그 남자들이 셋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둘만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육체이다.
소리-예를 들어, 한 장면, 지태와 선화가 선화의 집 베란다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때, 화면 밖에서는 '찹쌀떡~'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그들이 직접적으로 공유하지 않은 상상의 과거를 지향한다. 그들의 기억이 그들 사이에 공유되어 있다는 강한 믿음은 이 일상적인 사운드의 활용으로 깨어진다. ‘그들’의 기억은 추상적인 것이며,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기억으로 빠져들고, 과거와 현재의 이음매를 (그들 둘을 연결하지 않은 채) 교묘하게 엮을 수 있는 것이다.
남성들의 욕망의 대체물이 된 선화의(그리고 문호와 함께 여관에 든 여제자의) 육체는 그녀들의 것이 아니다. 그녀들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유일한 욕망은 자신이 다른 남성의 욕망의 대상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화는 헌준을 기다리고, 문호의 여제자는 관심있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일이 이렇게 됬는데 걔가 무슨 표현을 하겠죠” 라며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기다린다.
영화는 여성의 욕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여성의 육체가 온전히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태와 여제자가 여인숙에 들어간 장면에서)
'(여기는) 너무 더러워' '내가 빨아줄까요?' 의 중의법은 오히려 노골적이어서 솔직한 편이다.
오럴 섹스와 더러워진 빨래를 빠는 행위는 이 말장난에서
성적 욕망의 대상인 여성의 육체와 순결하고 깨끗한 육체에 대한 환상으로 정확히 겹쳐진다.
모든 남자의 공유된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여성은 한 번도 이 영화에서 스스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오직 욕망의 대상의 육체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창녀와 성녀의 진부한 이분법은 그들의 육체와 욕망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육체를 이용한다.
'오! 수정'의 수정이와 남자는, 생활의 발견의 예지원과 김상경은 적어도 그들의 육체를 주체적으로 욕망하였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 자신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들과 그들은 성적으로 주체적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왜곡되고 과장된 관계들 속에서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여성들의 육체는 그녀들에게서 분리되어 있다.
그들의 육체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며, 단지 남성의 기억과 욕망을 위해 이용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영화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분히 포르노그래피한 면이 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여성의 욕망을 배제하고 수동적인 위치에 그들의 육체만을 올려놓고 있으며, 남성들의 끊임없이 비껴가는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한다. 육체가 그것을 소유한 주체의 욕망에 의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에 의해 보여질 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포르노그래피한 시선이 된다.
욕망이 대상을 찾지 못하고 서로서로를 향한 화살표가 엇갈릴 때, 결국 누구의 욕망의 대상도 되지 못한 육체를 파국을 맞는다.
선화와 헌준의, 자신을 유혹하는 여제자와 그녀를 사랑하는(듯한) 남자의 욕망을 확인시켜 주면서
문호 스스로는 그 욕망의 관계망 속에서 튕겨져 나와 있다.(마지막에 홀로 길가에 서 있는 유지태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욕망의 관계망에서 비껴 나온, 버려진 육체의 파국을 말해 준다.)
그는 그 관계의 중심이면서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 이다.
그들의 사랑(혹은 밀고 당기는 관계는) 그녀(들)의 그의 몸에 대한 '요구'에 의해 가시화된다.
그녀(들)의 육체가 문호에 의해 드러날 때, 그녀(들)이 진정 '욕망'하는 남자(들)은 그녀(들)에 의한 소유욕과 질투라는 방식으로 그들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재확인한다.
자신의 욕망을 향하지 않는 미끄러지는 대상(육체)만을 욕망하지만(그는 선화의 몸, 다리의 털, 목소리, 머리스타일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육체에 대한 페티쉬) 정작 자신의 육체는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문호는 엇갈린 욕망의 화살표들 사이에서 버려진다. 그는 한없이 미끄러지는 욕망의 대상의 빈 구멍으로 남는다.
대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욕망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그것은 자신들의 욕망조차 부재했었던 여성에게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욕망의 관계망 속에서 비워진 채 존재했었던 문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배경은 지워진 채 인물 자체에만 집중하는 망원렌즈 속에서, 한 번도 배경-다른 사람과의 관계망 속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인물들은 어떤 열린 결말도 제시하지 못한 채 파국을 향해 치달아 간다.
최근 영화에서 이토록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결말을 내린 적이 없었던 홍상수는 이번 영화의 제목을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고 이름붙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자도 남자도 서로 그 누구의 미래도 아니며, 그들의 기억과 현재는 서로 조우하는 듯 하지만 폐쇄된 자기 자신 속에서 맴돌며 욕망과 대상의 화살표를 부딪힐 뿐이다. 그 과정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외설적이며, 파국을 바라보는 것은 전에 없이 불편하다. 그의 다음 영화에서 우리는 어떤 욕망의 흐름을 바라보게 될까.
이 영화는 홍상수의 세번째 영화이다.(다섯번째 영화가 아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 이후,
'오! 수정'과 '생활의 발견'에서 줄곧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의
육체에 대한 지난한 줄다리기를 계속한 이후, 그는
이 영화에서도 여전히 동어반복을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동어반복이 지루한 것은 그의 인물들 음담패설을, 일상의 잡다한 이야기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늘어놓아서가 아니라,
그것들을 반복하면서 점점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일상의 반복, 무기력, 지루함,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는 대신
그것들이 구축한 일상을 부정해 버리면서 스스로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시켜 버린다.
오 수정의, 포크와 나이프의 모티브처럼 같은 장면을 반복하며 기시감을 불러일으키기(헌준과 지태가 중국집 여자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수작을 거는 장면과 같은)와 같은 동어반복은 차라리 귀엽게 보아 줄 수 있다. 지겨운 것은 그러한 동어반복을 되풀이하는 인물들이다. 이제 더이상 그들은 공허하거나 귀엽거나 관객을 뜨끔하게 하지 않는다.
그저, 얼굴만 바뀐 한 여자 두 남자의 욕망의 화살표는 지루하기만 하다.
게다가 인물의 관계가 욕망의 화살표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대상만을 향한 것일때,
결과적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한 파국을 지켜보는 것은 불편하다.
그들의 육체는 어느 누구도 그들 자신의 욕망과 결부되어 있지 않다.
헌준의 욕망은 자신을 무한히 기다려준다고 믿고 있는 선화의 순결을 확인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선화가 강간당했다고 말했던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다.
문호는 선화의 육체를 욕망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믿으면서 파국을 자초한다.
사실 그가 욕망했던 것은 좀더 실제적인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훌륭한 학교'에서 교수가 되는 것, 그것은 스탠드에 모여 있는 학생들이 그에게 '선생님은 제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똑똑하세요'라는 말을 듣는 환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육체(목도리의 좋은 '냄새')에만 탐닉하는 그는 그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될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욕망하고 있다고 생각한 욕망의 대상에서 비껴져 나간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하면서(혹은 애써 무시하면서) 그 대상을 선화의 육체로 돌린다.
그것은 그 남자들이 셋이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 둘만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육체이다.
소리-예를 들어, 한 장면, 지태와 선화가 선화의 집 베란다에서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때, 화면 밖에서는 '찹쌀떡~'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것은 그들이 직접적으로 공유하지 않은 상상의 과거를 지향한다. 그들의 기억이 그들 사이에 공유되어 있다는 강한 믿음은 이 일상적인 사운드의 활용으로 깨어진다. ‘그들’의 기억은 추상적인 것이며,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속해 있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각자의 기억으로 빠져들고, 과거와 현재의 이음매를 (그들 둘을 연결하지 않은 채) 교묘하게 엮을 수 있는 것이다.
남성들의 욕망의 대체물이 된 선화의(그리고 문호와 함께 여관에 든 여제자의) 육체는 그녀들의 것이 아니다. 그녀들의 욕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들의 유일한 욕망은 자신이 다른 남성의 욕망의 대상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화는 헌준을 기다리고, 문호의 여제자는 관심있는 남자의 눈치를 보며 “일이 이렇게 됬는데 걔가 무슨 표현을 하겠죠” 라며 그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기다린다.
영화는 여성의 욕망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들의 유일한 관심은 여성의 육체가 온전히 자신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지태와 여제자가 여인숙에 들어간 장면에서)
'(여기는) 너무 더러워' '내가 빨아줄까요?' 의 중의법은 오히려 노골적이어서 솔직한 편이다.
오럴 섹스와 더러워진 빨래를 빠는 행위는 이 말장난에서
성적 욕망의 대상인 여성의 육체와 순결하고 깨끗한 육체에 대한 환상으로 정확히 겹쳐진다.
모든 남자의 공유된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여성은 한 번도 이 영화에서 스스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녀들은 오직 욕망의 대상의 육체로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한 창녀와 성녀의 진부한 이분법은 그들의 육체와 욕망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육체를 이용한다.
'오! 수정'의 수정이와 남자는, 생활의 발견의 예지원과 김상경은 적어도 그들의 육체를 주체적으로 욕망하였다.
그들의 육체는 그들 자신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녀들과 그들은 성적으로 주체적일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이 왜곡되고 과장된 관계들 속에서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여성들의 육체는 그녀들에게서 분리되어 있다.
그들의 육체는 더 이상 그들의 것이 아니며, 단지 남성의 기억과 욕망을 위해 이용된다.
그러한 점에서, 이 영화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분히 포르노그래피한 면이 있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여성의 욕망을 배제하고 수동적인 위치에 그들의 육체만을 올려놓고 있으며, 남성들의 끊임없이 비껴가는 욕망의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한다. 육체가 그것을 소유한 주체의 욕망에 의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욕망에 의해 보여질 때,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은 포르노그래피한 시선이 된다.
욕망이 대상을 찾지 못하고 서로서로를 향한 화살표가 엇갈릴 때, 결국 누구의 욕망의 대상도 되지 못한 육체를 파국을 맞는다.
선화와 헌준의, 자신을 유혹하는 여제자와 그녀를 사랑하는(듯한) 남자의 욕망을 확인시켜 주면서
문호 스스로는 그 욕망의 관계망 속에서 튕겨져 나와 있다.(마지막에 홀로 길가에 서 있는 유지태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욕망의 관계망에서 비껴 나온, 버려진 육체의 파국을 말해 준다.)
그는 그 관계의 중심이면서 또한 '아무것도 아닌 것' 이다.
그들의 사랑(혹은 밀고 당기는 관계는) 그녀(들)의 그의 몸에 대한 '요구'에 의해 가시화된다.
그녀(들)의 육체가 문호에 의해 드러날 때, 그녀(들)이 진정 '욕망'하는 남자(들)은 그녀(들)에 의한 소유욕과 질투라는 방식으로 그들의 대상에 대한 욕망을 재확인한다.
자신의 욕망을 향하지 않는 미끄러지는 대상(육체)만을 욕망하지만(그는 선화의 몸, 다리의 털, 목소리, 머리스타일에 유난히 관심이 많다.-육체에 대한 페티쉬) 정작 자신의 육체는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문호는 엇갈린 욕망의 화살표들 사이에서 버려진다. 그는 한없이 미끄러지는 욕망의 대상의 빈 구멍으로 남는다.
대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욕망은 결국 파국을 맞는다. 그것은 자신들의 욕망조차 부재했었던 여성에게도, 그리고 다른 사람의 욕망의 관계망 속에서 비워진 채 존재했었던 문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배경은 지워진 채 인물 자체에만 집중하는 망원렌즈 속에서, 한 번도 배경-다른 사람과의 관계망 속에 존재한 적이 없었던 인물들은 어떤 열린 결말도 제시하지 못한 채 파국을 향해 치달아 간다.
최근 영화에서 이토록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결말을 내린 적이 없었던 홍상수는 이번 영화의 제목을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고 이름붙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여자도 남자도 서로 그 누구의 미래도 아니며, 그들의 기억과 현재는 서로 조우하는 듯 하지만 폐쇄된 자기 자신 속에서 맴돌며 욕망과 대상의 화살표를 부딪힐 뿐이다. 그 과정을 바라보는 카메라는 외설적이며, 파국을 바라보는 것은 전에 없이 불편하다. 그의 다음 영화에서 우리는 어떤 욕망의 흐름을 바라보게 될까.
# by | 2004/06/13 20:17 | Cinema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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